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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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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우리 땅!  아름다운 독도! 해양과학으로 지켜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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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C
  • 1848년(조선 헌종 14년)
    4월 17일 미국 포경선 체러키(Cheroke)호가 독도를 발견함(북위 37도 25분, 동경 132도 00분).
  • 1849년(조선 헌종 15년)
    1월 27일 프랑스 포경선 리앙꼬르(Liancourt)호가 독도를 발견(북위 37도 2분, 동경 131도 46분)하여 ‘Liancourt Rocks’로 명명함. 이 사실이 프랑스 해군 수로지와 해도에 실림으로써 서양에 알려지게 됨.
    3월 18일 미국 포경선 윌리암 톰슨(William Thompson)호가 독도를 발견(북위 37도 19분, 동경 133도 9분), “세 개의 바위(3 rocks)를 보았다”고 기록함. 이는 조선 성종조의 삼봉도(三峯島)를 상기시키는 대목임.
  • 1854년(조선 철종 5년)
    4월 6일(러시아 구력) 푸쟈친 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극동 원정대 4척 중 하나인 올리부차호가 마닐라에서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던 중 독도를 발견함. 서도는 섬을 발견한 함정의 이름을 따서 ‘올리부차’로, 동도는 올리부차호의 최초 함정 이름이었던 ‘메넬라이’로 명명되었고, 두 섬은 조선의 영토로 파악됨. 독도에 관한 울리부차호의 탐사내용은 바스토크호의 울릉도 관측내용 및 팔라다호의 조선 동해안 측량내용과 함께 러시아 해군지(海軍誌) 1855년 1월 호에 실려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작성한 『조선동해안도』의 기초자료가 됨.
  • 1855년(조선 철종 6년)
    4월 25일 영국함대가 독도를 발견, 함정 이름을 따서 호넷(Hornet)으로 명명함.
  • 1870년(조선 고종 7년)
    1869년 12월 조선에 밀파된 일본외무성 관리들이 귀국하여 1870년 4월 복명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함. 이 복명서에는 ‘竹島(울릉도)와 松島(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되어 있는 시말(始末)’을 조사한 내용이 실려 있음.
  • 1875년(조선 고종 12년)
    11월 일본육군 참모국(參謀局)이『조선전도(朝鮮全圖)』를 작성, 이 지도에는 독도가 ‘송도(松島)’로 표기되어 실림으로써, 독도를 竹島(울릉도)와 함께 한국영토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1876년(조선 고종 13년)
    일본 해군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를 작성함. 이 지도는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제작한 지도를 저본으로 하여 재발행 작전지도인데,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부속도서로 표기하였음. 10월 16일 일본 국토의 지적(地籍)을 조사하고 근대적 지도(地圖)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시마네현에서 내무성으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키는지의 여부를 내무성에 질의. 내무성은 이에 대하여 약 5개월간에 걸쳐 시마네현에서 올라온 부속문서와 원록 연간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교섭한 관계문서들을 모두 조사해 본 후, 죽도와 송도는 조선의 영토로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림. 무등평학(武藤平學)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 해군성이 1878년 4월과 9월 군함 천성환(天城丸)을 파견, 송도의 실체에 대해 조사결과 송도가 조선의 ‘울릉도’로 판명되어 무등의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 각하됨.
  • 1877년(조선 고종 14년)
    3월 17일 내무성은 죽도(울릉도)외 1도(송도-독도)가 일본과 상관없지만, “판도의 취사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일본 최고행정기관 태정관(太政官)에게 질품서를 부속문서들과 함께 올려 최종결정을 요청함. 3월 20일 일본 최고행정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은 “품의한 취지의 죽도외일도(竹島外一島)의 건(件)에 대하여 본방(本邦)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심득(心得)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작성. 3월 29일 내무성으로 지령문을 보냄. 4월 9일 일본 내무성은 태정관의 지령문을 시마네현으로 보냄.
  • 1881년(조선 고종 18년)
    울릉도(鬱陵島)에 일본인 7명이 잠입하여 벌목하다가 수토관(搜討官)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강원도 관찰사 임한수(林翰洙)가 치계(馳啓)하여 대비책을 강구할 것을 청함.
    5월 22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계언(啓言)에 따라 이에 대한 서계(書契)를 일본 외무성에 보내게 하고, 부호군 이규원(副護軍 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에 임명함.
    7월 일본 북택정성(北澤正誠) '죽도고증(竹島考證)'을 작성하고 이를 요약한 '죽도판도소속고(竹島版圖所屬考)'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함. 일본은 1880년 군함 천성(天成)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하는 한편, 북택정성(北澤正誠)으로 하여금 울릉도, 독도의 역사와 관련자료를 조사하게 하였음.
    이 보고서는 지금의 송도(松島)는 원록(元祿) 12년(1699)의 죽도(竹島) 즉, 울릉도로서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결론 내림. 그리고 항에 “울릉도 외에 죽도가 또 있지만, 아주 작은 소도(小島)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독도에 관한 내용을 부가함.
  • 1882년(조선 고종 19년)
    4월 7일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이 하직함. 고종(高宗)은 울릉도(鬱陵島) 근방에 있다는 우산도(芋山島)와 송도(松島) 죽도(竹島)에 대해서 특별히 잘 살피고, 울릉도에 고을을 설치하기 위해서 지도(地圖)와 별도의 보고서(別單)를 상세히 작성할 것을 당부함.
    6월 5일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이 복명함. 그는 4월 30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5월 2일부터 10일까지 조사한 뒤 13일 평해 구산포(平海 邱山浦)로 돌아왔음. 그는 설읍(設邑)이 가능하며, 나리동(羅里洞)이 적합하다고 건의함. 또한 조사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나무를 도벌하고, 표목(標木)을 세워 송도(松島)라고 하고 있는 것을 적발하였므로, 이를 일본공사와 외무성에 항의하기로 함.
    8월 20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계언(啓言)에 따라, 울릉도(鬱陵島)에 도장(島長)을 차송(差送)케 함. 검찰사 이규원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에 거주하고 있던 함양사람 전석규(全錫奎)를 도장(島長)에 임명함.
  • 1883년(조선 고종 20년)
    3월 16일 김옥균(金玉均)이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등사사(東南諸島開拓使兼捕鯨等事使)로 임명됨.
    4월 일본해군수로국 '환영수로지'를 발간함. 제2권 『조선국일반정세』에서 독도(リヤコ-ルト 列岩)를 소개함으로써,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스스로 밝힘. 4월 울릉도에 첫 이주민 16호 54명이 들어옴.
    7월 조선 정부에서 울릉도에 들어온 첫 이주민의 정착상황을 조사함.
  • 1884년(조선 고종 21년)
    1월 11일 동남제도개척사 김옥균이 울릉도장 전석규(鬱陵島長 全錫奎)가 일본인과 담합하여 울릉도의 목재를 일본으로 반출시키고 있다고 장계함에 따라 전석규를 압송하기로 함.
    3월 15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울릉도(鬱陵島) 재개척에 있어 먼저 관수(官守)를 설치하고 그 후에 백성을 모집하여 땅을 개간하자고 계(啓)언함에 따라 강원도 관찰사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고 삼척영장으로 하여금 울릉도첨사를 겸하게 함(직명(職名) : 울릉도첨사겸삼척영장(鬱陵島僉使兼三陟營將)).
    6월 30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평해군수(平海郡守)가 울릉도첨사(鬱陵島僉使)를 겸하게 함.
  • 1888년(조선 고종 25년)
    2월 6일 내무부(內務府)의 계청에 따라 울릉도에 도장을 다시 설치하고 평해군 월송포에 만호진을 신설하고 월송진 만호(平海郡越松鎭萬戶)로 하여금 울릉도장(鬱陵島長)을 겸임하게 하고, 왕래하며 검찰케 함.
  • 1894년(조선 고종 31년)
    12월 27일 울릉도가 이미 개척되었으므로, 수토에 필요한 자원의 조달을 위한 ‘울릉도수토선격십물(鬱陵島搜討船格什物)’을 영구히 혁파함.
  • 1895년(조선 고종 32년/개국 504년)
    1월 29일 울릉도 수토정책(鬱陵島 搜討定策)이 이미 철훼되었으므로, 내무대신(內務大臣) 박영효(朴泳孝)의 상주(上奏)에 의해 월송만호(越松萬戶)가 겸하고 있던 울릉도장(鬱陵島長)을 별도로 임명하고, 매년 수차례 배를 보내어 도민(島民)의 질고(疾苦)를 살피게 함.
    8월 16일 내부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의 주청에 따라 울릉도(鬱陵島)에 도장(島長)대신 도감(島監)을 설치(設置)하기로 함.
    9월 20일 울릉도 사람 배계주(裵季周)를 울릉도감(鬱陵島監)으로 정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하기로 함.
  • 1898년(대한제국 광무 2년)
    5월 30일 칙령 제12호(5월 26일)로 울릉도감(鬱陵島監) 설치를 반포함. 도감(島監)은 본토인(本土人)으로 임명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함.
  • 1899년(대한제국 광무 3년)
    12월 19일 일본인의 도벌과 횡포가 계속되므로,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의 주청으로 울릉도(鬱陵島)에 시찰위원(視察委員)을 파견하기로 함. 시찰위원에는 우용정(禹用鼎)이 임명됨.
  •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
    5월 31일 울릉도시찰위원 우용정과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보 적총정보(釜山駐在日本領事館補 赤塚正補) 등 한·일 양국의 조사단이 울릉도에 도착하여, 6월 5일까지 일본인의 비행과 재목 도벌 및 세금징수 여부에 대해 조사하고, 도내(島內)의 실정(實情)과 도세(島勢)를 파악함.
    6월 15일 우용정이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하고, 일본인의 조속한 철수와 울릉도 관제(官制)의 개편을 건의함.
    10월 27일 칙령 제 41호(10월 25일)를 반포하여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바꿈으로써, 강원도의 27번째 군(郡)으로 지방관제(地方官制)에 편입됨. 칙령에 의하면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하고, 울도군수(鬱島郡守)의 관할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竹島(댓섬), 石島(독도)로 함.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였으므로, 현임도감 배계주(裵季周)가 초대군수가 되었으며, 울릉군을 남면(南面)과 북면(北面)으로 나눔에 따라 독도는 울릉군 남면에 속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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